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왕국 (문단 편집) === 건국에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 [[이탈리아 통일|통일 전쟁]]은 1861년 이탈리아 왕국 건국 후에도 계속되어 187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트렌티노알토아디제]]와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1870년 이탈리아 왕국의 인구는 2790만 명으로 유럽 국가 중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통일]]의 후유증이 너무 커[* 중세부터 근대까지 내내 수많은 국가가 병립해 있었고, 그 발전 양상도 달랐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에는 완전하게 [[이탈리아/문화|이탈리아화]]되었지만, 굳이 따진다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통치 가문인 [[사보이아 가문]]의 뿌리는 [[프랑스인|프랑스계]]였다. 물론 당시 이탈리아 내의 주요 국가인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모데나 공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파르마 공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은 [[보르본 왕조|스페인 부르봉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고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이어서 사보이아 가문은 이들에 비하면 훨씬 [[이탈리아인|이탈리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등 국내 혼란이 가중되었다. 통일 후 이탈리아 왕국의 의회는 [[카밀로 카보우르]]의 뒤를 이은 [[역사적 우파]](Destra storica)가 주도하였다. 그들은 반도 내 관세 장벽의 철폐를 통한 번영을 꿈꾸었으나, 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부의 대토지 소작농들과 포 강 유역의 일용직 농업노동자들은 상품을 구매할 재력이 미비했다. 교역망을 확충하려 해도 교통-통신 기술력이 부족했다. 또한, 통일운동이 농촌 사회구조 개혁을 일축한 대가로 통일 후 남부에 [[https://it.wikipedia.org/wiki/Brigantaggio_postunitario_italiano|브리간타조]] 반군이 들끓어, 이들을 진압하느라 전비를 더욱 많이 써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농촌에 고세율 정책을 실시하여 농촌 경제가 되려 후퇴했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 점령을 완수하면서 [[리소르지멘토]] 이데올로기가 생명을 다함과 동시에 자유주의 세력이 사상적 구심점을 잃어버렸다. 민족주의의 대중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카보우르가 통일 이탈리아를 만들었으니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데에는 이런 맥락이 있었다. 후대의 [[안토니오 그람시]]는 부르주아 혁명 세력이 사회 개혁을 통한 민중과의 연대를 거부하며 민족주의에 냉소적인 여론을 자초했다고 평했다.] 국민 통합에 유력한 이데올로기였던 [[가톨릭]]도 이용하기 어려웠다.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을 멸망시켜버림에 따라 교황청과 반목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바티칸에 틀어박혀 [[바티칸 포로]]를 선언하며 신생 이탈리아 왕국을 부정했고, 오르시니 가문, 콜론나 가문 등을 비롯한 교황령의 유명 귀족 가문은 교황령 멸망에 반발하며 [[검은 귀족]]이 되었다. 이른바 '로마 문제'이며, 무솔리니가 [[라테라노 조약]]을 맺을 때까지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현안 중 하나였다.] 1876년에 역사적 우파에 대항한 [[역사적 좌파]](Sinistra storica)가 집권하였다. 이들은 선거권 확대를 이끌어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대변 세력의 이권에 집착해 야합에만 열중했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이끌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마치니]]와 [[가리발디]] 추종자들로 시작한 이 당은 점점 남부 지주들의 정당으로 변모함으로써 세력을 불려 집권했다. 한편 이 시기엔 자유주의에 실망한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후 1900년에 [[움베르토 1세]]를 암살했다.] 등 혁명 세력이 점점 세를 불려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제 전복을 막고 자유주의를 지키고자 역사적 좌파의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와 역사적 우파의 마르코 밍게티는 손을 잡고 연립 정권을 구상하였는데, 이를 변환주의([[https://it.wikipedia.org/wiki/Trasformismo_(politica)|transformismo]])라고 부른다. 변환주의는 유연하고 중도적인 실용주의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하나, 보통 정파간 이권 나눠먹기와 부정부패로 취급된다. 이러한 변환주의는 무솔리니의 집권으로 전통적 자유주의자들[* 1913년 졸리티 정권기가 되면 역사적 우파와 좌파 모두 세력이 줄어들고 사회당 등의 타 정당이 의회에 참여하여 19세기부터 이어진 자유주의 세력은 변환주의 연대를 넘어 아예 자유 연합([[https://it.wikipedia.org/wiki/Unione_Liberale_(Italia)|Unione Liberale]], Liberal Union)이라는 이름으로 한 몸이 되었다. 이후 1922년 전간기 혼란 중에 이탈리아 자유당([[https://it.wikipedia.org/wiki/Partito_Liberale_Italiano|Partito Liberale Italiano]], Italian Liberal Party)으로 개명하여 파시즘 정권 성립을 지원했다가 무솔리니 독재정권 수립 후 활동 금지당하나 2차대전 이후 재건되어 1994년까지 유지되었다.]이 세력을 잃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식자층은 유물론이나 경제학보다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더욱 선호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 사실 이탈리아 뿐만이 아니라 20세기 대륙부 유럽 지식계층 전반에 [[대륙철학|이런 경향이 존재했다.]] 20세기 초중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이데올로기]]의 난립 역시 이러한 경향 하에서 벌어진 일. 오히려 유럽 대륙보다는 영미권의 실용주의와 경험주의가 특이하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이 있었다 보니 시대가 당면한 사회 문제도 경제나 [[유물론|사회 구조]]보다는 [[관념론|도덕성과 이데올로기의 부재]]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관점은 통일운동 시기부터 [[마치니]] 사상 등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적 좌파의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총리 또한 마찬가지로, 그는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를 [[이탈리아인]]의 적으로 보며 프랑스를 전쟁에서 굴복시켜 이탈리아인의 민족 의식을 고양하려 했다. 크리스피 내각은 프랑스와의 관세전쟁을 벌이고[* 당시 국제 추세가 보호주의로 흐르기도 하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설득해 [[독일 제국]]과의 [[삼국 동맹]]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거부했고 관세 전쟁은 남부의 과일 수출 산업을 붕괴시켰다. 한편 역사적 좌파가 이끄는 이탈리아 왕국은 국내의 혼란 해소 및 국제적 위상 제고, 남부 소작농의 이주를 통한 인구압 해소 등의 이유로 [[식민지]] 팽창에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이탈리아 왕국군]]을 동원해서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도와 전투]]에서 패배해 체면을 구기며 사임하였다.[* 이후 무솔리니 정권 시기 1936년에 와서야 에티오피아를 겨우 강점했으나, 그나마도 1941년경 [[영국군]] 주도 연합군에 의해 축출당해 강점 기간이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강점도 완벽하지 못해서 강점 기간 내내 에티오피아 고원 일부 지역은 [[하일레 셀라시에]]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전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옛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이탈리아에 대한 '''승전국'''으로서 이탈리아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는 [[리비아]]와[*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 [[소말리아]] 일부 지역을 식민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무솔리니 집권 후로도 제국주의 기조는 유지되어 [[알바니아]]와 1896년 패배의 굴욕을 당한 적 있던 [[에티오피아]]를 잠시 강점했다. 중국에는 1901년부터 조차지 형태의 [[이탈리아령 톈진]]이라는 식민지가 존재했으나, 1943년 일본에 의해 [[왕징웨이 정권]]에 반환됨으로써 사실상 소멸했고, 1947년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에 의해 중국 [[국민정부]]에 공식적으로 반환되었다. 다른 열강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라 해도 이탈리아 왕국의 인구는 1910년에 3720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크리스피 총리는 한편으론 남부 대지주의 토지를 분할하려다 의회의 지주 의원들로 인해 실패하고 이후로도 여러 정치 혼란 등을 겪으며 의회제를 혐오하기 시작해 대통령제를 검토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권위주의적 모습도 보였다.[* 브리간타조 반란 이후 통일 정부는 반란의 억압적 진압과 중앙집권적 시스템 강요, 교육과 징병 강제 등의 '자유를 강요'하는 행보를 보여왔고 식자층 사이에선 사회 문제의 원인을 자유주의의 나약함, 이기주의, 탐욕성에서 찾아 반자유주의적인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사회 혼란을 억압으로 해결하려는 전통이 [[이탈리아 파시즘]]의 토양이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이탈리아 왕국의 1890년대는 세기말이라는 단어에 걸맞는 혼란상과 이로 인한 위기로 끝나고 말기의 크리스피와 루이지 펠루[* 군 장성 출신 총리이다.]는 계엄령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등 왕국의 의회 정치는 위험에 빠진다. [[움베르토 1세]]가 암살됨으로써 더욱 심해질 뻔한 위기가 때마침 시작된 고속 경제성장으로 잦아들자, 사람들은 카보우르와 역사적 우파가 주장했던 번영의 꿈을 다시 꾸었다. 이탈리아 북서부 삼각지대의 공업은 190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사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현재의 부유한 북부 산업의 기틀을 닦는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크리스피의 보호무역으로 인한 공업 성장 효과와 [[로마 은행 스캔들]] 이후 금융조직의 재정비, 석탄의 부족을 대체할 알프스 수력발전의 성장을 통해 가능했다. [[피아트]], [[피렐리]] 등의 기업이 이 시기에 창설되었고 전통적 섬유산업 또한 큰 폭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조반니 졸리티]]이다. 그는 여러 경제성장 지원책을 펴고 선거권을 큰 폭으로 확대, 노사갈등에서 중립을 지키고 노동착취 규제법을 정비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으나 지지층이 미약해[* 졸리티가 손을 잡으려 한 사회주의 세력은 비협조적이었고 경제 성장의 수혜자 상공업 부르주아들은 졸리티의 친노동 정책에 분노했다. 당시 성장한 상공업 중산층의 지지 또한 미약했다.] 남부 지주들의 지지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해야만 했고 남부의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자연히 공업 성장이 농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사회 변화도 공업이 발전한 북서부에만 집중되었다. 상공업의 발전으로 중산층이 성장하고 [[미래주의]] 예술 사조가 등장하였지만 실용 분야보단 철학과 추상적 이데올로기를 선호한 식자층 분위기로 인해 무직 지식인 문제[* 남북 경제격차와 엮여 고급 일자리가 부족한 남부에서 특히 심했고 해고 시 바로 불만 계층이 될 식자층이 행정조직과 사법조직에 포진해 있다는 점이 비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개혁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해결되지 못했고 이들은 사회 불만층이 되어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투신하던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로 대표되는 초기 파시즘[* 사회주의를 제압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의 나약함을 비난하며 개인이 아닌 국가를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를 제창했다.]을 지지하였다. 졸리티는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이탈리아령 리비아|리비아]]를 점령하지만 리비아 각지에 반란군이 활개치는 반쪽짜리 점령이었던 데다가[* 당시 [[발칸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던 오스만 제국을 이기고 리비아의 통치권을 받아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현지 세력의 저항과 이탈리아의 1차대전 참전이 겹치며 현지 자치 세력과의 애매한 타협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후 1922년 독가스와 강제수용소를 동원한 재정복을 시작했고 1931년 영화 사막의 라이온으로 유명한 [[https://en.wikipedia.org/wiki/Omar_al-Mukhtar|오마르 무크타르]]를 처형하고 나서야 직접 통치력을 굳혔다.] 졸리티의 도덕성에 타격을 받아 정권이 흔들렸다. 졸리티는 어느 정도 전향적으로 변한 가톨릭과 협력해 정권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내부적으론 사회 문제로 몸살을 앓고 외부적으론 다른 [[열강]]들 틈바구니 속에 자기 영역을 넓혀 보겠다고 애쓰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져 버린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같은 게르만어권인 오스트리아-헝가리만 감싸는 독일과 상당히 사이가 멀어진 것도 있었고[* 전쟁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준비할 때 명색이 동맹인데도 이탈리아와 상의를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독일과 상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끝내 미련을 버렸다.], 사실 오스트리아와는 뿌리 깊은 적대 관계로 영토 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게다가 [[삼국 동맹]]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동맹으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반감을 품고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만든 동맹이 [[삼제동맹]]이었다. [[프랑스]]가 만일 [[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는다면 독일은 앞뒤로 위험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를 서로의 앞마당이라 생각하여 힘을 과시하면서 위태위태한 상황을 지속시키자 그에 대한 대안으로 [[삼국 동맹]]을 체결하였다.], 조약에 공수동맹인지 방어동맹인지 나타나 있지 않아 이탈리아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선제 공격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삼국 동맹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탈리아 내부적으로는 전쟁이 국민 통합과 [[쥐트티롤]],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달마티아는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와 [[달마티아어]] 등에 근거하여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미수복지로 취급받았다.] 등의 미수복지를 오스트리아로부터 수복할 수 있는 기회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 후 1915년 5월 협상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탈리아권 영토와 해외 식민지 약속을 받아 내고([[런던 밀약]])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하면서 협상국 측으로 참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